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생애 (문단 편집) === 라이프치히 칸토르 준비 === || [[파일:랑에.png|width=310]] || || 시장 고트프리트 랑에(Gottfried Lange, 1672~1748)[BR] 시의회의 대표자인 동시에 법률, 철학 박사였다 || 1722년 6월 5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였던 [[요한 쿠나우]]의 사망으로 라이프치히 시 참사회[* 28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 14명은 박사 학위를 갖고있는 고학력자들이었다.]는 그 후임을 찾았다. 당시 칸토르는 직책 이름으로만 보면 교회 부속학교의 음악교사이지만 실제로는 음악교육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라이프치히]] 도시 교회음악의 총책임자였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성 토마스와 성 니콜라이 두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교회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주간 금요일에는 대규모의 수난곡이 연주되었다. 이로 인해 상당히 존경받는 직책 중 하나였다. 또한 당시 라이프치히는 인구 3만의 대도시에, [[함부르크]]나 [[드레스덴]]에 맞먹은 상업도시이자, 라이프치히 [[대학]]이 있었고, 지식인들과 교수들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또한 굉장히 계몽적인 도시였고 무엇보다 [[루터교회]] 도시에 여러 음악활동이 열리는 도시라는 점이 바흐를 자극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당시 가장 유명한 [[작곡가]]이자 마찬가지로 [[함부르크]] 오주(五州)교회의 칸토르였던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이 이미 8월 11일 칸토르로 임명되었으나 3달 후인 11월 텔레만은 라이프치히의 제의를 거절했다.[* 텔레만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함부르크 시는 텔레만에게 더 높은 봉급을 약속하였으며, 추가적으로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감독직으로 임명하였다. 쾨텐을 오고가는 길에 텔레만이 바흐에게 칸토르직을 부추겼을 수도 있다. 텔레만은 [[바이마르]]에서 바흐의 차남 카를 필리프 엠마누엘 바흐의 대부를 서주기도 하였으며, 또 바흐가 죽은 후인 1751년 [[https://books.google.co.kr/books?id=OvSeGvRFm-YC&pg=PA258&lpg=PA258&dq=telemann+sonnet+bach&source=bl&ots=739kdXbE42&sig=IwUvlvsBWkZrA-5qH1ZQtVJGsq8&hl=ko&sa=X&ved=0ahUKEwiEi4nU0bHZAhUGNrwKHZkZCBgQ6AEIKjAB#v=onepage&q=telemann%20sonnet%20bach&f=false|그를 추모하는 소네트를 쓰기도]] 했다.] 그 외에 7명의 후보가 있었고, 12월 21일 추가로 두 명의 후보가 물망에 올랐는데 바로 역시 만만찮은 당대의 인기작곡가였던 다름슈타트 공국의 궁정악장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와 바로 바흐였다. 그라우프너 역시 성 토마스 학교 졸업생이자 라이프치히 대학의 학생이어서 바흐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음악가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며 그라우프너와 바흐 각각 1월 17일과 2월 7일에 라이프치히가 보낸 가사에 칸타타를 두 곡씩 연주하는 것으로 오디션 내용이 정해졌다.[* 참고로 그라우프너의 오디션 칸타타는 《깊은 구렁에서 당신을 부르짖습니다''Aus der Tiefen rufen wir, GWV 1113/23a''》와 《온 나라들아, 주를 찬양하라''Lobet den Herrn alle Heiden, GWV 1113/23b''》였다.] 쾨텐에 머물며 바흐는 칸타타 《당신은 진실로 하느님이시며, 다윗의 자손이십니다''Du wahrer Gott und Davids Sohn, BWV 23''》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거느리시고''Jesus nahm zu sich die Zwölfe, BWV 22''》를 작곡했다. 그러나 문제는 바흐가 라이프치히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라우프너가 칸토르로 선출되버린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름슈타트에서 그를 적극 붙잡는 바람에 그라우프너도 결국 오지 못했다. 그라우프너는 5월 4일 편지를 띄워 '''바흐는 교회음악과 성악곡의 권위자이며 오르간에도 아주 뛰어납니다. 분명히 바흐는 맡겨진 직책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입니다'''라고 썼다. 이에 라이프치히 시 참사회에서 '최고를 얻을 수 없다면 평범한 사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라는 발언이 나왔는데 그 2류 작곡가가 바로 바흐(...).[* 오늘날 바흐를 2류라고 여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대의 바흐는 텔레만이나 헨델 그라우프너등보다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흐가 대학을 가지 않아서(...).] 그나마 라이프치히 시장 고트프리트 랑에가 '바흐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텔레만을 곧 잊을 것이다'라며 바흐를 적극 두둔해주어 바흐는 만장일치로 5월 5일 칸토르로 임명되었다. 근데 바흐는 이틀 뒤에 깐깐하게도 [[라틴어]]로 된 신학시험을 또 보고 그 뒤에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근로계약서에는 도시 무단이탈 금지나 대학과 관련된 일 금지 등 빡빡한 조항들도 있었고 기본적으로 바흐에게 음악가보다는 선생으로서의 의무가 더 강조되었다. 14개 조항으로 되있는 근로계약서를 한 번 살펴보자. 계약서에서 시의회는 고자세로 나오며 바흐에게 가오를 잡고 있는데,(...) 음악 양식까지 하나하나 간섭하는 깐깐한 시의회의 태도로 인해 바흐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 나는 소년들의 바른 행동과 삶을 위하여 먼저 모범을 보일 것이며, 한교 수업에 열심을 내어 학생들을 성실하게 가르치겠습니다. > >2. 나는 이 도시의 2개의 중심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음악활동을 하겠습니다. > >3. 나는 존귀한 시의회에 대하여 존경과 복종으로 대하며, 그 명예와 이름을 어디서나 높이고 알리며, 또한 어떤 시의원들이 소년들에게 노래나 연주를 시킨다면 주저없이 그의 말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장이나 학교 이사들의 허락 없이는 어떤 경우라도 외부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 학생들을 동원하고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4.나는 존귀한 시의회가 학교의 감독관들과 이사들에게 부여한 권한을 인정하고 따를 것 입니다. > >5. 나는 음악의 기초를 배우지 못했거나 음악교육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학생들을 학교에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반드시 학교 감독관과 이사장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맡을 것입니다. > >6. 나는 학생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열심히 배우게 하여 교회가 불필요하게 별도의 지출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 >7. 나는 교회의 음악이 정돈되고 제 몫을 감당하려면 연주시간이 너무 길지 않고 적당해야 하며, 가곡풍의 음악은 안 되고, 청중이 예배할 마음이 나도록 도와주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8. 나는 새교회에 좋은 학생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9. 나는 소년들엥게 친절해야 하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을 벌주거나 그들의 집에 알리면 그들은 선생을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 >10. 나는 학교에서 주는 많은 정보와 나에게 유익한 것을 성실하게 인지하겠습니다, > >11. 나는 존귀한 시의회나 학교의 소속이 아닌 다른 어떤 기관을 통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 >12. 나는 시장의 허가 없이는 도시를 이탈하지 않을 것입니다. > >13. 나는 장례식에는 어떤 경우라도 소년들을 동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 >14. 나는 존귀한 시의회의 동의 없이는 대학에 관련된 일을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